<브런치 뉴요커의 글 #16> *제가 작성한 글이며, 브런치에서 작성한지는 시일이 경과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고, 매우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나는 내가 어찌나 운이 없는지를, 그리고 또한 반대로 얼마나 운이 좋은지를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나의 모든 우여곡절은 '신분'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 많았고, 그 스토리를 지금부터 풀고자 한다.
◆ F1 비자 - 학생 시절 ◆
매우 무더웠던 2010년 7월, 로드아일랜드주의 프로비던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나는 석사 유학을 시작하였다. 작은 도시에 생활 반경이 넓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차가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정환경이 부유하고 여유롭지 않아서 다른 유학생들처럼 도시 안에서나 학교 근처에 거주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도 석사 학생들에게는 기숙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나는 시내의 버스 터미널에서 약 40분 정도 떨어진 한 버스 라인의 종점에 살고 있었다. 대학원이 있는 외곽의 캠퍼스까지는 1시간 이상이 걸리곤 하였다.
그래도 버스로 오가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애초에 부모님 도움으로 오게 된 유학에 차가 필요 없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물론, 여러 가지 불편한 것이 매우 많았다. 장을 보거나 가고 싶은 곳을 가야 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내 삶에 차는 사치라고 여기며 약 6개월을 근근이 버텨냈다. 하지만 그 겨울 12월은 차가 없이 긴 거기를 오가는 내게는 큰 시련이었다.
폭설이 왔던 다음날인 어느 일요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저녁 6시 무렵 집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 일요일이라 막차가 일찍 끊기고, 유학생이 굉장히 많은 도시라 겨울 방학이 되면 유령 도시가 되는 특성상 겨울에는 막차가 더욱 일찍 끊겼다. 그래도 그 추운 날 버스를 타게 된 것이 어디냐며 안도했었다 (그 당시에는 우버도 없었고, 택시는 굉장히 비쌌다. 더군다나 폭설이 왔어서 시내에 간간히 있는 콜택시는 그날따라 보이지도 않았다). 한참을 잘 가고 있던 버스는 한 대형마트에서 정차를 했고, 모든 사람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추운 날 밤에 버스 타고 장 보러 오는 사람이 이렇게 많나?'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기사는 내게 종점이니 내리라고 하였다.
'What?!'
종이로 된 버스 스케쥴을 보았다. 일요일 6시 막차는 딱 내가 살던 곳까지의 노선중 절반만 운행하고 종료되는 차였고, 나는 그 이전 버스를 탔어야 했다. 외진 곳에 있는 마트라 아무 답도 없었고, 차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를 부르기에는 거리도 멀고 눈도 왔어서 미안해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걸었고, 무작정 걸었다.
차로 20분 정도 가면 되는 거리를 40여분을 걸었다. 미국의 시골길은 인도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로등도 한국처럼 잘 되어있지도 않다. 어두컴컴한 도로의 가장자리를 걷는 것은 위험하기도 했고 매우 서러웠다. 특히나 전날 도로에 쌓인 눈들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바람에 걸을 수 있는 도로도 매우 좁았다. 한참을 걷는데 녹은 눈으로 생긴 물들을 지나가는 차들이 내게 퍼붓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 흐르는 물이 눈이 녹은 더러운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정도로 서글펐다.
집에 도착하니 속옷이며 양말까지 흠뻑 젖었다. 샤워기를 틀고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서러운 아이 마냥 엉엉 울었다. 정말 펑펑 울었다. 타지에서 의지할 것도 가족도 없이 지냈던 6개월의 시간이 서럽게 느껴졌다. 그 날 나는 미국에서 대도시 주변이거나 도시 안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꼭 차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어렵게 부모님께 차량 구매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어려운 환경이지만 도와주시기로 하였다. 한국차 브랜드에는 교민 할부가 있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친구들과 함께 찾아갔다. 지금에서야 와서 생각하면 참 무식하고 차별적인 발언을 그때 들었다.
'너는 이 나라에선 유령 같은 존재다. 뭘 믿고 너한테 차를 할부로 제공하겠나'
지금이라면 노발대발 난리를 치며 당당하게 매니저 불러서 한소리하고 자동차 회사 미국 지사에 전화를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것이 내가 겪었던 첫 '신분'의 서러움이었다. 나는 더군다나 미국의 주민등록 번호인 Social Security 번호도 없었기 때문에 불가능했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중고차로 눈을 돌렸고, 마침 집 앞에 조그마한 중고차 상점에 고등학교 시절 나의 로망이었던 한국의 그랜저 XG가 눈에 들어왔었다. 8년 되고 한국 기준으로 160,000 km가 넘은 아주 오래된 낡은 차였다. 그래도 굴러간다면 그게 어디인가 하는 마음으로 표기된 가격보다 $2,000을 깎아내어 차를 가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졸업할 때까지 시험기간이면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남아서 시험을 준비하고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 Optional Practical Training (OPT) 신분 ◆
미국은 해외에서 정규 유학을 와서 학비를 지출한 사람들에게 미국 취업의 경험을 제공하고자 만든 OPT 프로그램이 있다. 해당 비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내가 작성한 비자에 관한 정리 글을 보면 자세히 나와있다. 나의 가장 큰 비운이자 행운은 OPT가 아니었나 싶다. 11월 졸업 후 12월 중순경 내 OPT 신청서는 허가가 나와서 배송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졸업 후 여러 미국 호텔 대기업을 포함한 인터뷰를 앞두고 있었고, 몇 회사는 커리어 페어에서 이미 구두로 어느 정도 고용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내 미국에서의 인생은 앞으로 쭉쭉 잘 나갈 일만 남은 줄 알았다. 그때 OPT를 잘 받았다면 4월까지 내 능력을 잘 보이고 H1B를 받아서 무난히 영주권의 길로 가는 것이 목표였다.
중순에 허가가 된 OPT는 우체국의 조회 시스템을 활용해서 조회를 해보니 지역 우체국에 도착하여 내 주소로 배송을 나갔다고 적혀있었다. 그 후로 1주일간 소식이 없었고, 여전히 Out for Delivery 상태였다. 왜 슬픔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우체국 슈퍼바이저와 대판 싸우고서야 분실되었다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보험도 걸려있지 않는 우편물이라 재신청 말고는 답이 없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비단 나만 겪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왜 하필 나인가 싶었다. 잡아둔 인터뷰와 취업 기회는 공중분해되었다. 다음 OPT 카드를 신청하고 기다리며 $300 가량의 돈과 3개월 정도의 시간을 허공에 날렸다. 물론 H1B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 E2 Employee VISA로 살아남다 ◆
그래서 내게 미국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우선 OPT로 한국 회사에 입사하여 E2 Employee 비자를 받고 추후 H1B로 변경이나 영주권 진행만이 답이었다. 이때 비자 공부를 정말 미친 듯이 했던 것 같다.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앨라배마에 있는 현대, 기아차나 하청업체들, 미국에 있는 한인마트, 중소기업 등 많은 지원을 했고 많은 오퍼를 받았다. 그중 그래도 가장 기업 신뢰도나 안정성이 있는 SPC의 파리바게트에 입사하였고, 여러 상사분들이 업무에 대한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E2 Employee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미국 내에서 신분 변경을 했기 때문에 한 번 출국을 하면 다시 돌아오려면 해외에 있는 (한국 포함)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새로 받았어야 했다. 미국 내 신분변경과 다르게 대사관 비자 발급은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심층 면접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 때도 방학중에도 가보지 못한 한국을 2년간 추가로 가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며 버텼다.
E2 Employee 비자를 신청하면서 들어간 변호사비와 프리미엄 프로세싱 비용, 서류비 등을 포함하면 약 700만 원에 가까운 돈을 썼다. 그리고 2년 정도가 지난 후 나는 다시 이 비자를 연장했어야만 했다. 더 이상 가족을 못 보면서까지는 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리스크가 있더라도 이왕 다시 받는 것 한국에 가서 대사관 면접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변호사도 만류했지만 나는 가야만 했고, 회사 윗분들께 다시 못 뵐 수도 있으니 인사를 드린다 고까 지하고 6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이때 면접을 위한 회사에 대한 심층 자료를 달달 외우느라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나는 또 변호사 비용으로 약 400만 원을 썼다.
그래도 그 어려운 면접을 잘 준비하고 순발력 있게 대답을 잘하여 영사께서는 힘차게 도장을 찍어주시며 축하한다는 코멘트와 함께,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2년짜리가 아닌 5년짜리를 주겠다고 하였다 (출입국도 자유로운). 너무 기뻐서 대사관에서 울 뻔했던 기억이 있다. 5년 동안은 변호사비 걱정 안 해도 되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몇 년 후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내의 회사에서 아내에게 영주권 지원을 해준 덕분에 영주권 진행 중간에 일정 단계 이후 이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 영주권을 준비하다 ◆
영주권 진행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Labor Certificate (LC)라고 불리는 절차는 영주권 진행자에 대해서 미국 노동국에서 해당 인력이 미국 국민이 대체할 수 없는 중요 인력임을 입증해야 하는 단계이다. 그래서 주요 일간지에 해당 포지션에 대한 광고나 실제 구인을 위한 인터뷰 등이 진행되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임자가 없어서 회사에서 이 인원에게 영주권을 해줘야 함을 증명하는 단계이다. 이 과정 중 일부만이 Random Audit이라고 불리는 무작위 감사에 걸리게 되는데, 우리는 참 운이 없게도 이것에 뽑히게 되었다. 그 오딧에 걸렸다는 것도 우리 부부의 첫 결혼기념일 여행지인 시애틀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알게 되었다. 우리의 첫 결혼기념일 시애틀 & 포틀랜드 여행은 참 좋으면서도 암울했다.
보통 오딧에 걸리게 되면 2~3개월이 추가로 소요되게 된다. 다행히 나는 그 이후에 Work Permit인 노동허가서가 빠르게 나와주면서 제한된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아내는 기나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면서 영주권 신청 시 인터뷰가 의무화되었다.
왜 하필 우리가 영주권을 들어갈 때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을까? 이 영주권 인터뷰 절차 때문에 영주권 진행에 소요되는 프로세스는 최소 3개월 이상이 더 늘어나게 되었고, 최근에는 점점 더 이것이 길어지는 추세이다. 또한 인터뷰가 의무화된 지 이력이 길지 않아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풍부한 편은 아니다. 그래도 이것저것 서류며 면접 내용을 꼼꼼히 준비를 하였고, 우리는 6월 초에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친절한 심사관분을 만나게 되어 무겁지 않은 분위기에서 면접을 잘 마쳤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당일 승인은 받지 못하였다. 당일 승인이 오히려 흔하지 않은 경우이긴 하지만 우리는 혹시 뭘 잘못한 것이 있는지 불안감에 휩싸였다. 인터뷰 이후 1년, 2년을 기다린 다는 글들을 보니 그 불안감을 더욱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우리가 인터뷰 보기 전에 맨해튼 빌딩에 헬기 추락, 이민국 새로운 수장 교체 등이 발생하면서 자칫하면 우리도 긴 기다림 혹은 실패를 맛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New Card is Being Processed ◆
최근 영주권 진행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이 짧은 문장 하나가 가지고 오는 폭풍 감동과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 영주권 진행 상황 안내에 갑자기 변경된 이 안내 문구는 지난 9년의 기나긴 힘든 시절과 신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선사해주었다. 더 이상 운전면허증에 '임시 방문자'라는 빨간 글자를 볼 필요도 없어졌으며 자주 갱신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DMV는 정말 가기 싫은 곳이다. 그 이유는 영화 Zootopia를 보시면 알 것이다 (아래 사진 참고).
우리는 비로소 이제야 진정한 미국에서의 자유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최근 이메일 (csh129m@gmail.com)이나 인스타그램 DM (newyork.tom)을 통한 취업이나 비자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고 있다. 특히 이전 글인 '미국에서 퇴사는 이렇게' 브런치 글의 조회수가 90,000명을 돌파하면서 감사하게도 여러 가지 질문공세와 응원의 메시지를 많이 받게 되었다.
가장 많은 질문이 비자나 영주권 진행에 대한 추세에 관한 것인데, 단순히 희망적인 메시지를 드리기에는 사실 최근 현실이 녹록지 않다. H1B의 경우 인도나 중국 유령회사들 덕분에 향후 심사나 기준이 매우 엄격하게 상향될 예정이거나 실제로 변경이 되었으며, E2 Employee 비자에 대한 서류 심사도 트럼프 행정부 이전보다는 더욱 어려워졌다. J1 인턴쉽 비자로 미국에 올 수는 있겠지만 향후 어떻게 비자 전략을 풀어나가느냐에 대한 부분은 현실적으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글의 서두에 얼마나 운이 좋은지를 느끼는 부분이다. 아무리 내 상황이 이전 세대들보다 더욱 어려워지고 깐깐해진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솔직히 지금 비자나 영주권을 준비하는 분들에 비해서는 수월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취업이나 이민을 준비하시는 분들이라면 나 같은 개인이나 몇 검증 안 된 기관들보다는 전문 이민 변호사의 상담을 받는 것을 가장 추천한다. 흔히 케바케라고 각 개인의 상황과 배경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른 것이 이민 준비이며, 그러한 케이스들을 가장 많이 다뤄보고 승인을 끌어내는 것이 이민 변호사들이기 때문에 비용이 조금 들더라도 (보통 기본적인 상담 같은 경우는 비용을 받지 않는다) 전문적인 변호사를 통해서 꼼꼼히 준비할 것을 추천드린다.
우리는 여기까지 오게 되면서 많은 부분에 감사를 하며 살기로 하였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살아오면서 신분의 제약까지 안고 살아감은 미국에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기에는 늘 망설임을 주는 주제이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비록 운도 없고, 많은 비용을 쏟아붓기도 하는 등 순탄치 않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고, 또한 앞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로 하였다. 그리고 너무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보다 더 젊은 세대들이 느끼고는 모국의 상황들에 의한 고통 때문에 그곳을 벗어나서 미국에 정착하거나 취업을 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기로 하였다. 사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비록 조언을 구할 수 있던 선배나 인터넷 정보가 지금처럼 발달하지는 않았던 시기에 왔지만 지금의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정보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큰 행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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